공산성은 사적 제12호로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백제인 475년부터 538년까지 백제를 지킨 왕성이다.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 산성이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산성,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산성에 머문 이후 쌍수산성으로도 불리웠다. 조선 선조, 인조 때 지금과 같은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이후 지속적으로 사용된 공산성에서 시대별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다. 포곡형 산성이란 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성을 말한다.
벡제인들이 산위에 왕궁을 지은 이유는 성벽은 밖에서 오르지 못하게 쌓고 남북에 두 개의 문루와 적에게 보이지 않는 출입문인 암문을 만들었다. 공산성 옆의 공주 옥녀봉성은 흙으로 쌓은 퇴모식성으로 공산성의 보조왕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공산성의 서문은 금서루이다. 동쪽에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누각은 광복루이다. 종문터에는 동문루, 공산성 남쪽에는 진남루가 있다.
백제문화제 기간에는 백제의 고도 공주의 상징인 공산성 앞에서 금강신관공원까지 부교로 건널 수 있다. 금서루에서는 백제왕국의 위풍당당함을 '웅진성수문병근무교대시'에서 볼 수 있고, 공주 금강 변의 금강신관공원에서는 밤풍경이 아름다운 공산성 감상이 가능하다. 백제 1500년의 역사를 전하는 공산성은 유네스코 등제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로 백제 문주왕1년인 475년에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였다가 성왕 16년인 538년에 부여로 천도 할때까지 공주를 수호하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웅진은 공주 지역의 엣 이름이다.
공산성 성벽길을 따라 북쪽에 위치한 곳을 걷다보면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평지가 있는데 고려시대에 지워진 영은사가 오래 세월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함께 가을을 맞이하기 시작하면서 주변은 가을 빛갈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에위치한 백제 연못은 원형모양으로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빗물을 받아 저장하는 연못으로 사용되었다. 영은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쌍수산 공산성 내에 있는 사찰이다.
영은사와 사이에 위치한 연못은 공산성에 세개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발굴 당시에는 흙으로 덮여 있었는데 발굴 조사 결과를 확인하여 새롭게 정비하였으며 특정적인 건축 양식이며 탑을 거꾸로 쌓아 놓은 모양으로 위는 넓고 아래는 좁은 형태로 연못의 가장 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층단을 쌓았으며 수면과 접근을 쉽게 할수 있게 계단 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쌍수정은 공산성 진남루 부근의 서쪽 고지대에 위치한 정각으로 원래 그 터는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공산성 파천시 머물렀던 장소이며 공주를 인절미의 고장으로 부르게 된 이야기도 있는 곳이다. 임씨라는 농부가 찰떡을 해가지고 인조에게 바쳤는데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어 임서방이 절미한 떡이라 하여 임절미라 한것이 오늘날 인절미로 바뀌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