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유적지구 익산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마동 즉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인 현재의 미륵산을 찾아던이야기와 창건에 대한 전설을 기록해 놓고 있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제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 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되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고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륵사는 백제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음을 알 수 있고 3탑 3금당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미륵사는 미륵사상을 가람에 구현하고 있으며 미륵사는 일반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미륵사의 가람은 중문, 탑, 금당을 일직선으로 배치한 중원과 이를 둘러싼 회랑, 그리고 중원과 거의 비슷한 금당과 탑을 중원의 동쪽과 서쪽에 비치한 삼원병립식 가람으로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독창성을 보이고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이다. 석탑은 거의 전면이 붕괴되어 동북면 한귀퉁이의 6층까지만 남아있었으나 본래는 9층으로 추정된다. 동쪽탑은 목탑이 아니라 석탑임이 밝혀져 동서 쌍탑의 배치였으을 알게 되었다. 동탑은 그 뒤 발굴조사에 의해서 9층으로 확인되어 1992년에 9층 높이의 27.67m로 복원되었다. 이 석탑을 우리나라 최고의 석탑으로 보고 있는 이유는 이 탑의 양식이 그 이전에 성행하였던 목탑의 각부 양식을 나무 대신 돌로써 충실하게 재현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운 기둥인 지주를 말한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높이 395cm로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미륵사지 석탑 남쪽에 2개의 지주가 동서로 약 90m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당이란 불화를 기린 기로 당을 걸었던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의 좌우에 세우는 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문화유산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하고 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1997년에는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개관하였다.
1980년 이후 미륵사지 발굴조사에서 2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1993년 미륵산 사자암 발굴조사에서 백제 및 통일신라의 기와와 토기, 지치2년사자사와명 암막새등이 축토되어 삼국유산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와유록, 금마지 등의 고문헌기록과 17년간의 발굴조사를 종합하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왕권강화를 그리고 국력신장을 목적으로 조성한 동양 최대 최고의 국가 사찰이며 조선 후기 17세기 무렵에는 폐사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